지금 회사 안에서의 시간을 연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만약 내일 회사 없이 혼자 일한다면, 지금과 같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뒤로 같은 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속도에 대한 감각이 바뀌었다

조직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의사결정이 단계와 시간이 느리고, 상대방 업무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무너지고 있다. AI를 활용하면서 나의 시간 단위가 짧아졌다.

그렇다고 회사 밖에서 내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 건 아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많이 만들어봤지만 다르다. 책임이 다르고, 경계가 다르고, 무엇보다 비용이 다르다. 속도가 답답하지만 밖에서 살아본 적은 없는 사람. 어정쩡하다.

그래서 지금을 연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어정쩡함을 받아들이는 방향을 바꿨다. 회사 생활이 영원하지 않다면, 지금 회사 안에서의 시간은 내 일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회사가 월급을 주면서 내 일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면, 같은 일이 다르게 보인다.

연습이라고 부르고 나니 질문이 바뀌었다. 예전엔 "내 업무를 어떻게 편하게 할까"가 먼저였다. 연습이라고해서 대충한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인데 보는 각도를 다르게 보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AI가 크게 영향을 줬다. AI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시점부터 사고의 위치가 한 단계 위로 옮겨간 느낌이 있다.

파이프라인 하나가 진화한 방식

매일 반복하는 파이프라인이 있다. PRD 작성 → 프로토타입 제작 → Figma 변환 → Confluence 문서화. 이 흐름이 내 안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면 사고 방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드러난다.

1단계: 각 단계가 따로 놀았다. 프로토타이핑으로 일관성 있는 결과물을 내는 게 어려웠다. Claude code, Cursor, Codex 등 AI 도구로 각 단계를 잇기 시작했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내 일의 속도가 달라졌다.

2단계: 방법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AI를 제각각 활용하면 결과물도 제각각이 된다. 같은 파이프라인을 다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다는 게 보였다. 그래서 내 방법을 정리해서 제안하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거치기 시작했다.

3단계: 비용과 속도를 같이 본다. 팀이 잘 쓰는 도구가 있다고 해서 효율적인 건 아니다. AI 사용 비용, 학습 곡선, 유지보수 부담, 도구 간 전환 비용까지 포함되는데, 같은 결과를 내는 두 방법 중 어떤 게 더 싸고 빠른지를 따지게 됐다. 한 영역에 도구가 너무 많이 늘어나면 오히려 느려진다는 것도 이 단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단계마다 질문이 바뀌면서 옮겨갔다. "어떻게 빨리?"에서 "어떻게 같이?"로, 그리고 "어떻게 싸고 빠르게?"로.

AI가 영역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이 세 단계를 거치는 동안 내가 다루는 영역의 범위가 넓어졌다.

실무자였을 때 내 영역은 명확했다. 기획. 옆은 디자인, 옆은 개발, 옆은 데이터였다. 각자 자기 영역의 디테일을 알고, 영역 사이는 회의로 연결했다. 그게 조직이 일하는 정상적인 방식이었다.

리더는 경계를 넘나들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디자인의 디테일을 다 몰라도 결과물이 좋은지 판단해야 하고, 개발 코드를 못 짜도 일정이 합리적인지 판단해야 한다. 리더의 진짜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자기 영역에서는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하는 자리에 놓인다.

AI는 이 경계를 개인 차원에서 허물고 있다. 디자이너만큼 디자인을 잘 못해도, AI로 시안을 빠르게 만들어보고 어디가 어색한지 같이 검토할 수 있다. 개발자만큼 코드를 못 짜도,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고 구현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 디테일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디테일을 들여다보는 탐색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한다.

그렇게 생긴 시간을 예전에는 내 전문 영역을 더 깊이 파는 데 썼다. 지금은 다르다. 내가 잘 모르는 영역 — 재무, 마케팅, 데이터 — 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바꿨다. 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미뤘던 일을, AI가 만들어준 여백으로 하게 됐다.

PO로 일하면서 이걸 미리 해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영역은 플랫폼 기획이지만, 매일 디자인을 들여다보고, 코드를 들여다보고, 데이터를 들여다본다. AI는 내 역할을 바꾼 게 아니라 증폭시켰다.

검수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여전히 책이 필요하다

AI가 영역을 허물수록, 역량의 무게중심이 실행에서 검수로 이동한다. 실행은 AI가 대신할 수 있지만, 그 결과를 판단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내가 기준선을 가진 영역 — 기획, 플랫폼 설계, 일부 프론트엔드 — 에서는 AI 결과를 보면서 "이건 괜찮네", "이건 이상한데"가 직관적으로 보인다. 기준선이 약한 영역 — 개인 재무, 마케팅, 회계 — 에서는 AI가 그럴듯한 답을 내놔도 맞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영역에서 결국 돌아가게 되는 건 내가 선배에게 배운 방법인데, 그 영역의 대표 책 10권쯤을 읽는 일이다. 대표 도서들을 모아 읽으면 그 일에 대해서 러프하게 알게되고 그 위에서 AI에게 위임한 결과를 검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AI가 좋은 부하인 건 분명하다. 다만 그만큼 나도 부지런하게 배워야 한다.

도구가 발달할수록 가장 오래된 방법인 책 읽기가 다시 중요해진다는 게 역설적이다. 다만 그때의 책 읽기는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AI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사전 준비가 된다. 같은 행동인데 위치가 달라졌다.

지금 하고 있는 연습

회사를 나가고도 같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까. 그 질문을 기준으로 지금 하는 일을 다시 본다.

방법을 혼자서도 검증할 수 있는가. 내가 만든 방식이 나만 알고 나만 쓰는 것이라면, 회사 밖에서도 작동하는지 알 수 없다. 제안하고 피드백 받는 과정을 거쳐야 그 방법이 진짜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비용을 직접 부담해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가. 회사가 비용을 대줄 때는 좋은 도구가 비싼지 잘 안 보인다. 혼자 일하면 그 비용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 한 발 물러나서 비용을 같이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모르는 영역에서도 결과물을 검수할 수 있는가. AI에게 위임하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그 결과를 판단하는 능력이 따라와야 한다. 요즘 한 영역씩 책을 모아 읽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 셋 다 회사가 월급을 주는 동안 할 수 있는 연습이다. 혼자 일할 때는 실패의 비용이 더 크다. 지금 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글로 쓰는 이유

머릿속의 생각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다. 모순이 있어도 넘어가고 빈 곳이 있어도 채워진 척한다. 글로 옮겨야 빈 곳이 드러난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랬다. "회사 안의 연습"이라고 쓰는 순간, "그건 진짜 연습인가, 아니면 핑계인가"라는 반박이 따라붙었다. 머릿속에서만 굴렸다면 그 반박을 못 만났을 거다.

연습인지 핑계인지는 결과로만 증명된다. 회사를 나간 뒤에도 이 시간이 연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하는 일들이 회사 밖에서도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매일 그 기준으로 내 일을 다시 본다. 이건 회사 안에서만 의미 있는 일인가, 밖에서도 의미 있는 일인가.

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뒤로, 같은 회사 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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